겨울을 대표하는 책_설국
겨울이 되면 생각나는 여행지나 사람, 영화가 있듯이, 책으로는 설국이 있겠죠? 책의 첫장은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이곳에 굳이 옮겨적지는 않도록 하겠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풍경을 무척 아름다운 운율과 단어로 묘사해주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그와 함께 어느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글에서 시각적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예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설국의 좋았던 부분을 옮겨보고나서 간략하게 독후감을 적어볼게요.
가. 설국 본문 요약 및 필사_시마무라, 고마코, 요코
40~41p. 밤 풍경
사방의 눈 얼어붙는 소리가 땅속 깊숙이 울릴듯한 매서운 밤 풍경이었다. 달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많은 별은, 올려다보노라니 허무한 속도로 떨어져내리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별무리가 바로 눈앞에 가득 차면서 하늘은 마침내 머언 밤의 색깔로 깊어졌다. 서로 중첩된 국경의 산들은 이제 거의 분간할 수가 없게 되고 대신 저마다의 두께를 잿빛으로 그리며 별 가득한 하늘 한 자락에 무게를 드리우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맑고 차분한 조화를 이루었다.
74~75p.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대화
문득 시마무라는 고마코에게 육체적인 증오를 느꼈다.
당신들 세 사람 사이에 어떤 사정이 있는진 몰라도 그 아들은 지금 죽을지도 몰라. 그래서 만나고 싶어하니까 찾으러 온 게 아냐? 그냥 돌아가. 평생 후회할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이 숨이라도 끊어지면 어떡할거야? 고집 부리지 말고 깨끗이 잊어버려.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오해하고 있어요.
당신이 도쿄로 팔려갈 때 배웅해 준 오직 한 사람 아냐? 가장 오래된 일기에 맨 먼저 써놓은 그 사람 목숨의 맨 마지막 장에 당신을 쓰러 가는거야.
싫어요, 사람이 죽는 걸 보는 건.
이 말이 차가운 박정함으로도, 너무나 뜨거운 애정으로도 들리기에 시마무라는 망설였다. 일기따윈 이제 쓸 수 없어요. 태워버릴거야 하고 고마코가 중얼거리는 사이, 왠지 뺨이 붉어졌다.
당신은 솔직한 사람이죠? 솔직한 사람이라면 제 일기를 모두 보내드릴 수 있어요. 저를 비웃지 않는 거죠? 당신은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시마무라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감동을 받아, 그렇다, 나만큼 솔직한 인간은 없다는 느낌이 들자, 더 이상 고마코에게 억지로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고마코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75p.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마무라
국경의 산을 북쪽으로 올라 긴 터널을 통과하자, 겨울 오후의 엷은 빛은 땅밑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했다. 낡은 기차는 환한 껍질을 터널에 벗어던지고 나온 양, 중첩된 봉우리들 사이로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산골짜기를 내려가고 있었다. 이쪽에는 아직 눈이 없었다.
>설국의 가장 첫 문장, 여행을 시작하는 모습과 대조적인 표현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의 시선을 보여줍니다.
7p. 여행의 시작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133-134p. 고마코와의 작별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은 듯, 오래 머물렀다. 떠날 수 없어서도, 헤어지기 싫어서도 아닌데, 빈번히 만나러 오는 고마코를 기다리는 것이 어느새 버릇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고마코가 간절히 다가오면 올수록 시마무라는 자신이 과연 살아 있기나 한 건가 하는 자책이 깊어졌다. 이를테면 자신의 쓸쓸함을 지켜보며 그저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것뿐이었다. 고마코가 자신에게 빠져드는 것이 시마무라는 이해가 안 되었다.
고마코의 전부가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오는데도 불구하고 고마코에게는 시마무라의 그 무엇도 전해지는 것이 없어 보였다. 시마무라는 공허한 벽에 부딪는 메아리와도 같은 고마코의 소리를, 자신의 가슴 밑바닥으로 눈이 내려 쌓이듯 듣고 있었다. 이러한 시마무라의 자기 본위의 행동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나. 설국 요약, 느낀점 정리
돌아올 곳이 있기 때문에 여행이 즐거운 것이라는 말이 있죠. 돌아갈 곳이 있는 시마무라와 고향이라는 목적지를 저 멀리 두고온 채 '헛수고'만을 하고 있는 고마코와 요코.
서사적인 즐거움 보다는 하얀 눈밭에서 가만히 바람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차가운 청량감 때문에 이 책을 자꾸 펼치는 것 같아요. 현대의 시선에서는 꽤 불편하게 읽힐 것 같은 설정인데요 한량인 여행객 남자와 빚을 갚기 위해 고향을 떠나 관광객들에게 노래를 들려주는 게이샤 둘. 굳이 성별로 구분하기 보다는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과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로 구분해서 본다면 좀 더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삶을 여행으로 바라본 것이 아닐까 싶어요. 10대에 겪어야만 했던 부모님과 조부모의 잇따른 죽음. 어린 시기에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강제당할 수 밖에 없었기에 남들보다 한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다른 작가,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자연과 시간의 표현은 자꾸만 그의 책을 들춰보고 싶어지는 이유인 것 같아요.
이 책 어딘가에 4년전 삿포로행 비행기 티켓이 끼워져 있더라구요. 몇 해가 지난 뒤 다시 펼쳐본 이 책에서는 어떤 설국이 저를 맞이해줄지 궁금해지네요. 추운 겨울, 모두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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