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장의 친절한 설명_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어떤 책인가?
우리에게 상실의 시대, 해변의 카프카, 1Q84 등으로 알려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독후감을 정리해봤습니다. 하루키는 현재 73세인데요 글을 읽다보면 전혀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 놀라움을 아직까지 선사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젊다는 말을 들으면 생각이 나는 몇 명이 작가가 있는데 고 이어령 교수, 김형석 교수, 무라카미 하루키 등을 꼽을 수 있겠네요.
이 책은 소설가로서 평생을 살아온 작가가 느낀 점들과 소설을 잘 쓰려면, 작중에서는 오랜 시간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자세히 풀어낸 작품입니다. 본인의 경험과 주변의 평가, 대중들에 대한 생각을 주제 별로 서술했기 때문에 혹시 소설이나 다른 작품을 집필하고자 고민했던 적이 있는 분들에게는 꽤나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작품을 읽다보면 그가 하는 이야기가 꼭 소설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당부하는 거장의 메시지로 전해집니다. 글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노력. 단 한 문장으로 전하기엔 그 의미가 제대로 담기기 어려운데요. 각 주제를 관통해 끝에 다다르면 보다 명확하게 보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2.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주요 내용 정리 및 요약
77~79p. 대중과 문학상
어디까지나 눈대중에 지나지 않지만, 습관적이고 적극적으로 문예 서적을 읽는 층은 일본 전체 인구의 5퍼센트쯤이 아닌가 하고 나는 추측합니다. 독자 인구의 핵이라고 할 5퍼센트입니다. 요즘 책에 무관심하다, 활자에 무관심하다, 라는 얘기가 자주 들리고 그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5퍼센트 전후의 사람들은 설령 '책을 읽지 마라'라고 위에서 강제로 막는 일이 있더라도 아마 어떤 형태로든 계속 책을 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는 습관이 일단 몸에 배면-그런 습관은 많은 경우 젊은 시절에 몸에 배는 것인데-그리 쉽사리 독서를 내던지지 못합니다. 가까이에 유튜브가 있건 3D 비디오게임이 있건, 틈만 나면(혹은 틈이 나지 않더라도) 자진해서 책을 손에 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스무 명에 한 명이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책이나 소설의 미래에 대해 내가 심각하게 염려할 일은 없습니다. 전자책이 이러니 저러니 하는 얘기도 현재로서는 굳이 염려하지 않습니다. 매체나 형식은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책을 읽어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괜찮습니다.
내 자신이 진지하게 염려하는 것은 나 자신이 그 사람들을 향해 어떤 작품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뿐입니다 그 외의 것은 어디까지나 주변적인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전체 인구의 5퍼센트라고 하면 600만 명 정도의 규모입니다. 그만한 시장이라면 작가로서 어떻든 먹고살 수 있지 않을까요. 다만 나머지 95퍼센트의 인구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 사람들이 문학과 정면으로 마주할 기회는 일상적으로 그리 많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그 기회는 앞으로 점점 더 감소할지도 모릅니다. 이른바 '활자 무관심'은 더욱더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마 현재로서는 적어도 그 반절쯤은 사회문화적 사안으로서, 혹은 지적인 오락으로서 문학에 나름대로 흥미를 갖고 있어서 기회가 닿는대로 책을 읽어볼 생각인 것으로 보입니다. 문학의 잠재적인 수용자라고 할까.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어떤 창구 같은 게 필요합니다. 혹은 쇼룸 같은 것이. 와인으로 말하자면 보졸레 누보, 음악으로 말하자면 빈 필하모닉의 신년 음악회, 달리기로 말하자면 하코네 역전 같은 것이죠.
105p.
나 자신의 체험에 따라 생각한 것인데, 자신만의 오리지널 문체나 화법을 발견하는 데는 우선 출발점으로서 '나에게 무엇을 플러스해간다'는 것보다 오히려 '나에게서 무언가를 마이너스 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것들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정보 과다라고 할까 짐이 너무 많다고 할까. 주어진 세세한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자기표현을 좀 해보려고 하면 그런 콘텐츠들이 자꾸 충돌을 일으키고 때로는 엔진의 작동 정지 같은 상태에 빠집니다. 그러니 어떻게도 뛰어볼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선 필요 없는 콘텐츠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정보 계통을 깨끗하게 해두면 머릿속은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꼭 필요하고 무엇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지, 혹은 전혀 불필요한지를 어떻게 판별해나가면 되는가. 이것도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자면, 매우 단순한 얘기지만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즐거운가'라는 것이 한가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뭔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데 만일 거기서 발생적인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아낼 수 없다면, 그걸 하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나 조화롭지 못한 것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때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즐거움을 방해하는 쓸데없는 부품, 부자연스러운 요소를 깨끗이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건 말로 하는 것만큼 간단한 일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110p.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 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을-혹은 자기 자신까지도-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문장도 쭉쭉 커나갑니다. 생각해보면, 굳이 자기표현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보통으로, 당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뭔가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자연스러운 문맥 속에서 우리는 의외로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118p.
내가 생각하기에는, 소설가가 되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우선 중요한 것은 책을 많이 읽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흔해빠진 대답이라서 죄송하지만, 이건 역시 소설을 쓰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빠뜨릴 수 없는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소설이라는 게 어떤 구성으로 이루어졌는지, 그것을 기본부터 체감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달걀을 깨야 한다'는 것과 똑같을 정도로 당연한 얘기지요. 특히 젊은 시절에는 한 권이라도 더 많은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닥치는 대로 읽을 것. 조금이라도 많은 이야기에 내 몸을 통과시킬 것. 때로는 뛰어나지 않은 문장을 만날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작업입니다.
그다음에 할 일은-아마 실제로 내 손으로 글을 써보는 것보다 먼저-자신이 보는 사물이나 사상을 아무튼 세세하게 관찰하는 습관을 붙이는 것이 아닐까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나 주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어찌 됐건 찬찬히 주의 깊게 관찰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이래저래 생각을 굴려본다. 하지만 '생각을 굴려본다'라고 해도, 그 일의 시시비비나 가치에 대해 조급하게 판단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결론 같은 건 최대한 유보해서 뒤로 미루도록 합니다. 중요한 것은 명쾌한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니라 그 일의 원래 모습을 소재로서 최대한 현상에 가까운 형태로 머릿속에 생생하게 담아두는 것입니다.
소설가로 적합한 사람은 이를테면 '이건 이렇다'라는 결론이 머릿속에서 내려지더라도, 혹은 자칫 내려질 것 같더라도, '아니 잠깐, 어쩌면 이건 나 혼자만의 억측일 수도 있어'라고 멈춰 서서 다시 생각해보는 사람입니다. '세상일이란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나중에 뭔가 새로운 요소가 불쑥 튀어나오면 얘기가 180도 달라질지도 모르잖아'라는 식으로.
168p. 시간
요즘에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옛날 작가들 중에는 '마감에 쫓기지 않고서는 소설 같은 건 못 쓴다'고 호언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문인답다고 할까 스타일로서는 꽤 폼나게 보이지만, 그렇게 시간에 쫓겨 급하게 글을 쓰는 방식이 언제까지고 가능한 게 아닙니다. 젊은 시절에는 그걸로 잘 풀렸더라도, 또한 어느 기간에 그런 방식으로 뛰어난 작품을 써냈더라도, 긴 스팬을 두고 부감해보면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작품이 점점 묘하게 비쩍 마른 듯한 느낌이 듭니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자면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로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입니다. 시간에 컨트롤당하기만 해서는 안 되지요. 그래서는 역시 수동적이 되고 맙니다. '시간과 밀물 썰물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쪽에서 기다릴 생각이 없다면 그런 사실을 분명하게 받아들이고 이쪽의 스케줄을 적극적으로, 의도적으로 설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즉 수동적이 아니라 내 쫌에서 적극적으로 도전해가는 것입니다.
나의 어떤 작품도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잘 썼을 텐데'라는 것은 없습니다. 만일 잘 못 쓴 것이 있다면 그 작품을 쓴 시점에는 내가 아직 작가로서의 역량이 부족했다-단지 그것뿐입니다. 유감스럽기는 해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부족한 역량은 나중에 노력해서 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 잃은 기회를 돌이키는 것 불가능합니다.
181p. 지속력
긴 세월동안 창작 활동을 이어가려면 장편소설 작가든 단편소설 작가든 지속적인 작업을 가능하게 해 줄 만한 지속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면 지속력이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단 한 가지, 아주 심플합니다-기초 체력이 몸에 배도록 할 것. 다부지고 끈질긴, 피지컬한 힘을 획득할 것. 자신의 몸을 한편으로 만들 것.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그리고 경험적인 의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편성 따위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자리에서 애초에 개인 자격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내 의견은 아무래도 개인적, 경험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날마다 달리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 자신은 오래도록 뭔가 잘 알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달리다 보면 물론 몸은 건강해집니다. 지방은 줄고 균형 잡힌 근육이 붙고 몸무게도 조절됩니다. 그러나 꼭 그것만은 아니다,라고 나는 늘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깊은 곳에는 좀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라고. 하지만 그 '뭔 가'가 무엇인지, 나도 확실히 알지 못했었고 나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 우선 이 달리는 습관은 끈질기게 유지했습니다. 삼십 년이라면 상당히 긴 세월입니다. 그만한 세월 동안 줄곧 한 가지 습관을 변함없이 유지하려면 역시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가. 달린다는 행위가 몇 가지 '내가 이번 인생에서 꼭 해야 할 일'의 내용을 구체적이고 간결하게 표상하는 듯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몸이 안좋아. 별로 달리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라고 나 자신에게 되뇌면서, 이래저래 따질 것 없이 그냥 달렸습니다. 그 문구는 지금도 나에게 일종의 만트라 주문처럼 남아있습니다. '이건 내 인생에서 아무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라는 것.
196p. 행운
행운이란 말하자면 무료 입장권 같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유전이나 금광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그걸 찾아내고 일단 손에 넣으면 그다음은 만사 오케이, 살살 부채질이나 해가며 안일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라는 건 아닙니다. 그 입장권이 있으면 당신은 행사장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하지만 그냥 그것 뿐입니다.
입구에서 입장권을 건네고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취하고 혹은 버릴지, 거기서 생기게 될 몇 가지 장애물을 어떻게 뛰어넘을지,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재능이나 자질이나 기량의 문제고, 인간으로서의 기량의 문제고, 세계관의 문제고, 또한 때로는 극히 심플하게 신체력의 문제입니다. 어쨌든 그건 단순히 행운이라는 말만으로는 미처 다 처리되지 않는 사안입니다.
(중략)
인생이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경향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인간은 늦건 빠르건 반드시 다른 한쪽에서 날아오는 보복(혹은 반동)을 받게 됩니다. 한쪽 편으로 기울어진 저울은 필연적으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은 말하자면 자동차의 양쪽 두 개의 바퀴입니다. 그것이 번갈아 자리를 잡으며 제 기능을 다할 때, 가장 올바른 방향성과 가장 효과적인 힘이 생겨납니다.
259p. 자기치유
나를 위해서 쓴다, 라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대체적으로 나 자신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만 의식하면서 썼습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몇 가지 이미지를, 나에게 딱 감이 오는, 납득이 가는 단어를 사용하고 그 말을 적절히 조합해 문장의 형태로 만들어간다. 머릿속에 있는 건 단지 그것뿐이었습니다.
아울러 거기에는 아마 '자기 치유'적인 의미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창작 행위에는 많든 적든 스스로를 보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상대화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지금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형식에 끼워 맞추는 것을 통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다양한 모순이나 뒤틀림, 일그러짐 등을 해소해나간다-혹은 승화해나간다-는 것입니다. 딱히 구체적으로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도 그때 그러한 자기 정화 작용을 본능적으로 추구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야말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소설이 쓰고 싶어 졌던 것이겠지요.
3. 감상평, 소감
책을 출간했던 시점으로는 35년, 현재 기준으로 41년간 소설가로 살아온 그의 단단함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긴 시간 동안 변화하는 생각들과 삶의 모습을 잘 적어냈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저는 삶의 다양한 변곡점에서 하루키의 작품과 함께했습니다. 독자로서는 약 20년간 그의 글을 읽은 셈인데, 여러 작가들 속에서 유난히 특별한 그의 문체는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됐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줍니다.
10대와 20대를 지나 30대에 이르러 최근엔 그의 소설보다는 에세이에서 많은 감명을 받는 것 같아요. 특히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관해서 방향을 크게 바꿔준 고마운 작품이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소설과 독자에 대한 이야기가 주이고 달리기에 대한 부분은 짤막하게 실렸으나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던 때를 떠올릴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 책은 앞서 말했듯이 소설가가 되기 위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었지만 신기하게도 삶을 살아가는 우리 존재들에게 힘이 되는 작품이에요. 마치 든든한 페이스메이커와 함께 긴 도로를 달리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의 글들은 무더운 여름날, 젊었던 나(지금도 젊다고 적을 수 있긴 하겠으나), 그리고 그때 옆에 있었던 사람들을 떠오르게 해 줍니다. 이 책에서는 구체적 내용이 아닌 제목으로만 등장하지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노르웨이의 숲>과 같은 작품명들을 다시 만나는 순간 뭔가 누자베스 노래를 들어야 할 것 같고, 내 삶은 구체적이지 않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 이대로는 안된다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생겨나는 그런 시점이 생각나 그리워지더라고요. 여기까지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난 뒤의 제 생각입니다. 오랜만에 긴 시간을 들여서 읽은 책이었습니다. 아마도 소설이 아니라 삶에 대입해 읽다 보니 생각이 많아져서 정리까지 오래 걸렸던 것 같아요. 그의 진심이 전해지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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