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앙드레 폴 기욤 지드, 프랑스, 1869~1951)는  상징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지상의 양식>은 그가 20대에 발표한 작품인데 발표 후 초판 1,650부가 다 팔리는 데에는 꼬박 18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처음 11년 동안 팔린 책은 500권에 불과했다고 하네요.

 

스물일곱의 앙드레 지드는 당시 흐름보다 너무나 앞선 생각을 문학으로 표현했고 당시 사람들은 실존주의에 몰입한 나머지 상징주의 문학에 대해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이 책은 에세이도, 시도, 소설도 아닌 지드만의 독특한 구성과 체계를 갖춘 작품입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초반에 이런 배경지식이 없이 읽다가는 금방 지루해져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작가의 삶과 행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나, 작품에 있어서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요 그가 전하려 하는 메시지. 나타나엘(동지), 즉 우리에게 전하려는 의미만큼은 진심으로 읽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지상의 양식>과 <새로운 양식> 두 부분으로 구성돼있습니다.

 

각각의 장에서 지드가 펼친 생각과 행복에 관한 입장, 삶에 대한 태도 등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데요, 언어의 틀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형식을 이용해 메시지를 전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느껴지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새로운 양식>은 1935년(66세)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앙드레 지드_지상의 양식(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7)

<지상의 양식>

12p.

나는 문학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인공적 기교와 고리타분한 냄새로 찌들어 있던 시기에 이 책을 썼다. 당시 나는 문학이 다시금 대지에 닿아 그저 순박하게 맨발로 흙을 밟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다. 이 책이 얼마나 그 시대의 취미와 충돌하였는가는 당시 이 책이 인기를 얻는 데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떤 비평가도 이 책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없었다. 10년 동안 이 책은 겨우 500부가 팔렸을 뿐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 젊은 시절의 책에 비추어 나를 판단하려 든다. 마치 <지상의 양식>의 윤리가 나의 삶 전체의 윤리라도 되는 것처럼, 또는 내가 나의 젊은 독자에게 "나의 책을 던져버려라, 그리고 나를 떠나라."라고 했던 충고를 나 자신이 제일 먼저 위반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다. 나는 <지상의 양식>을 쓰던 때의 나를 이내 떠나버렸다. 그리하여 나의 생애를 돌이켜 볼 때 거기서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특징은 예측 불허의 변덕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불변의 충실성임을 알 수 있다. 가슴과 머릿속에 깊이 뿌리박은 이 불변의 충실성, 나는 그것을 지극히 희귀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죽음이 눈앞에 닥쳐왔을 때, 성취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던 것이 성취된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의 이름을 말해 달라. 나는 바로 그들 곁에 나의 자리를 잡으리라.

 

46p.~54p.

"잘됐군."하고 말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할 수 없지."하고 말하라. 거기에 행복의 커다란 약속이 있다.

 

행복의 순간들을 신이 내려주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다른 순간들은 신이 아닌 누가 주었다는 말인가. 나타나엘이여. 신과 그대의 행복을 구별하지 말라.

 

나타나엘, 내 그대에게 "순간들"을 말해주리라. 그 순간들의 '현존'이 얼마나 힘찬 것인지 그대는 깨달았는가? 그대가 그대 생의 가장 작은 순간에까지 충분한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 것은 죽음에 대하여 충분히 꾸준한 생각을 지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 순간이, 이를테면 지극히 캄캄한 죽음의 배경 위에 또렷이 드러나지 않고서는 그런 기막힌 광채를 발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대는 깨닫지 못하는가?

 

우리에게 생은 야성적인 것, 돌연한 맛 그리고 나는 여기서 행복이 죽음 위에 피는 꽃과 같음을 사랑한다.

 

항구적이고 위협적인 죽음의 존재는 순간의 즐거움과 쾌락을 더욱 절박하고 더욱 귀중하게 만들어 준다는 앙드레 지드

 

76p.

시간이 달아나 버리는 것이 나는 너무 안타까웠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언제나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선택이 내게는 고르는 것이라기보다는 고르지 않은 걸 버리는 것으로만 보였다. 시간이 좁다는 것과 시간이 하나의 차원밖에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끔찍한 마음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폭이 널따란 어떤 것이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것은 한낱 선에 지나지 않았고, 나의 욕망들은 그 선 위를 달리면서 어쩔 수 없이 서로 짓밟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이것'아니면 '저것'밖에 할 수 없었다.

 

<새로운 양식>

219p.

매일 나로 하여금 신을 발견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감사하는 내 마음이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고 끊임없이 경탄을 금치 못한다. 고통의 끝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왜 기쁨의 끝에 오는 아픔보다 더 크지 못한 것인가?

 

그 까닭은 슬플 때는 그 슬픔 때문에 누리지 못하는 행복을 생각하지만, 행복에 잠겨 있을 때는 그 행복 덕분에 면하게 되는 고통들을 조금도 머리에 떠올리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행복하다는 것이 당연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인 것이다.

 

각자에게는 자신의 감각과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행복의 양이 할당되어 있는 것. 아무리 소량이라도 그것을 빼앗기면 그것을 도둑맞은 것이 된다. 내가 존재하기 전에는 내가 생명을 요구했는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지금은 모든 것이 나의 몫으로 주어진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의 필요성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라고 가르쳐준다.

 

269p.

나는 나의 다양성을 통해서 어떤 불변성을 분명히 느낀다. 내가 다양하다고 느끼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다. 그러나 그 불변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느끼는데 무엇 때문에 그 불변성을 얻어내려고 애쓰는 것일까? 나는 내 일생을 통해서 나를 알려는 노력을 거부해왔다. 다시 말해서 나를 찾는 것을 거부해 왔다. 내가 보기에 그러한 탐구,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런 성공은 존재를 제한하고 빈약하게 만들 것 같았다. 혹은 어지간히도 빈약하고 한계가 있는 인사들만이 자신을 발겮고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아니 어쩌면 자신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존재와 그 발전을 제한한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다음에는 자신의 모습과 닮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기가 발견한 그 모양 그대로 남아 있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오히려 미래의 기대를,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는 생성 변화를 끊임없이 지켜 나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에게는 어떤 식으로 확고하게 이치에 맞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어떤 식의 의지보다, 자신과 단절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모순이 덜 거부감을 일으킨다. 사실 나는 그 모순이 외견상으로만 모순일 뿐 실제로는 깊이 감추어진 어떤 연속성과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나는 이경우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언어의 표현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실제 삶에서 보다 더 많은 논리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경우가 잦고, 또 우리들 내면의 가장 귀중한 것은 표현되지 않은 상탱로 남아있는 부분이니 말이다.

 

295p.

오 그대, 지금 나는 그대에게 이 글을 쓰고 있지만-전에는 내가 나타나엘이라고 너무 구슬픈 이름으로 불렀던 자네, 그리고 지금은 동지라고 부르는 자네-이제 더 이상 마음속에 구슬픈 것은 아무것도 허용하지 말라. 구슬픈 탄식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을 그대 자신에게서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대 스스로가 얻을 수 있는 것을 더 이상 남에게 청하지 말라.

 

나는 그대에게 희망을 건다. 나의 기쁨을 받아라. 만인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것을 그대의 행복으로 삼아라. 그대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면 그 어느 것도 나쁘게 받아들이지 말라. 모든 것이 자기가 하기에 달렸다는 것을 끊임없이 마음에 새겨라. 비겁하지 않고서야 인간이 하기에 달려있는 모든 악의 편을 들 수는 없는 법. 예지가 체념 속에 있다고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한 적이 있거든 다시는 그렇게 생각지 않도록 하라.

 

동지여, 사람들이 그대에게 제안하는 바대로의 삶을 받아들이지 말라. 삶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굳게 믿어라. 그대의 삶도, 다른 사람의 삶도, 이승의 삶을 위안해주고 이 삶의 가난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어떤 다른 삶, 미래의 삶이 아니다. 받아들이지 말라. 삶에서 거의 대부분의 고통은 신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들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그대가 깨닫기 시작하는 날부터 그대는 그 고통들의 편을 더 이상 들지 않게 될 것이다.

 

 

<지상의 양식> 독서후기

 

구스타프 클림트의 표지그림이 무척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다만 작가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묘하게 아름다우면서 아이러니한 표지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지상의 양식>과 <새로운 양식>은 각각 앙드레 지드가 스물일곱과 예순여섯의 나이에 발표한 작품인데, 민음사에서는 이걸 하나로 묶어서 발간했습니다.

 

<새로운 양식>은 읽으면서 절대로 이건 이십 대가 쓸 수 없는 글이라고 생각했고, 뭔가 이상해서 찾아보니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12년 전에 발표했다고 하네요. 그제야 수긍이 갔습니다. 물론 <지상의 양식>은 이 세상 어느 20대가 쓰기에도 쉽지 않은 작품이죠. 저는 백번 정도 다시 생을 산다면 써볼 수 있을까요.

 

시간과 삶과 그중에서의 선택.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죽음. 항구적 위협인 죽음은 우리에게 순간의 즐거움(쾌락)을 보다 절실하게 느끼도록 해준다.

 

고통의 끝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왜 기쁨의 끝에 오는 아픔보다 더 크지 못한 것일까? 


 

작가의 답을 옮겨 적으면서 비슷한 고민을 했던 지난날들이 떠오르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위 문장을 적으면서 다시 한번 떠올리는 생각은, 고통과 기쁨에는 모두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는 정말 좋은 작품들이 많아요. 언제쯤 다 읽을 수 있을지, 한 작품을 읽다가 작가의 다른 작품으로 자꾸 빠지게 되니 행복한 일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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